(오늘도 잠 자는걸 실패한, 불면증 진작에 걸린 인간은,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 또 글을 써대고 있다.)



락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국 락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이 분에 대해, 한 마디로 존경한다 라는 말부터
꺼낼 것이다. 
필자 역시 당연히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오늘의 포스팅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음악가 신중현씨와
그의 대표곡인 
그 유명한 아름다운 강산에 대해서 나름 아는 것을 토대로 포스팅 하겠다. 하여 시작 초에 나오는,
필자가 오래 전에  
갖고 있던 다음 뮤직 중에서 동일 노래의 더 오래된 버전을 먼저 올려놓고 시작하겠다.

▲ 신중현과 The Men - (1972 초판) 최초 버전

 

시대를 앞서간듯 멜로디 색채가 아예 이국풍이던가 전혀 다른 그런 뮤지션들이 있었다 과거에는. 그 중에서도
신중현씨 
이 분의 음악적 스펙트럼은 지금까지도 그런 장중한 사운드로 대단한 곡을 누가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감탄만을 
낳을 뿐, 대체자던 이 아성을 넘을 자는 전무후무하다는 개인적인 평가를 하며 시작하겠다.
좀 그런 특색있는 노래를 
유독 좋아라 했다보니 당연히 안 좋아할 수가 없다. 허나 가수라는 부분에서 보면,
젊었을 때보다 차라리 나이가 든 
이후가 더 낫다는 냉정한 평가를 하겠다. 작사 작곡과 신들린 연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목소리는 솔직히 답답하다. 
잘 하는 것처럼 들리지가 않았지만, 발음도 틱틱 뱉는듯 그렇게
들렸어도, 이 사람이어서 매력이 있던거였구나를 안건 
필자 역시 나이를 먹어가면서 다시 꺼내 들어보고난 후에
새삼 진가를 알게 된거였다.

 

 

70년대 초반 태생인 필자는 유독 어릴제 기억을 비교적
또래보단 
선명하게 기억하는 편이라서, 뭐 좀 발달됐었던지
여튼 이미 그런게
꼬맹이 유치원 시절 이전부터도 귀에
꽂힌다던가 이런 편이었다.
그래서 그 때에 꽂힌 올드팝을
수 십년간 추적하다가 제목 알아내고
원래 부른 싱어를
찾아내는 둥, 유난맞게 환장하게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 내용은 본 게시판의 스팀의 나나 헤이 헤이... 이 곡의
포스팅을 보면
어느 정도로 열성적이었는지 추억담이 적혀있다.

다만 그렇게 특색이 있는, 한국 가요의 유행하는 양상과
멜로디 패턴이
아예 다른 듯한 곡들은 대체로 박정희 시절에
퇴폐적이니 하는 오명을
쓰고 금지 시키기가 일수였다.
왜냐면 딱 들어도 마약같은 묘한 중독성도
강한데다가
기저에는 자유분방한 갈구가 들어있어서 당시 시대상을
너무 앞지른 여러 생각들이 짙게 베어있으니, 불건전
하다느니
마약 대마초 사범이다로 씌워서 정지를
멕인다던가 금지를 씌워두던가 하면서,
안가 같은데서
정은숙 심수봉 이런 사람
다 끼고서 자기는 차지철이고
누구하고 술들 쳐묵대며 총탄에 맞을 때까지 지 혼자만
독재자답게 듣고
독식하려던 이런 식이었다는거.

아, 태극기 부대나 박정희 사랑하는 사람들... 필자에게
이 개인 견해에
딴지걸지 말아라. 우선 여기는 필자 개인의 공간이고 이 나라는 

생각의 자유도 표현의 자유도 있으니, 가르치려 들려거든 니 애들이나 가르쳐라. 하도 흉흉해서 그런거는 사전에
'너님 
내가 법으로 걸어버릴거야 건들면.' 이런거 깔아야 된다, 독재 국가도 아니건만. 뭐 그런 파급을 줬던
음악적으로 이국적 색채 강한 가수들은 윤복희 윤항기 남매, 신중현, 펄씨스터즈 등등 제법 많다. 대체로 공통
사항이
미8군을 오갔던 이력들이 있어서, 한국스런 유행가하곤 맥락이 좀 다른 음악을 구가했지 싶다.

 

 



신중현이라는 사람이 목소리나 외모가 매력적인건 필경 아닌데도, 음악적인 면에서는 정말 독보적인 색채를 가졌다. 이 사람을 먼저 구글
에서 나무위키랑 위키백과에서 조금 찾아보았다.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란 말이 단지 록 음악으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압도적인 서구의 문화 앞에서 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한국적 정체성을 구현하고자 했는가 하는 그 창조적인 노력에 경의를 표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 평론가 강헌[1]


이름 신중현 (申重鉉)
출생 1938년 1월 4일, 경성부[3]
데뷔 1955년 미8군 연예단
가족 아버지 신익균, 슬하 3남
학력 서라벌고등학교 중퇴, 
        버클리 음악대학 명예박사[4]

 

서울 명동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의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집안이 만주로 이사했다. 당시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미용사 장사를 했다. 어릴 때는 좀 사는 집 아들이었다고 하나, 한국 전쟁 이후 가난해져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 창고지기 등의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창고지기를 하면서 고물 라디오로 미군 방송을 온종일 들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음악에 빠지게 된다. 거의 폐품이 되어 누군가가 내다버린 기타로 연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뮤지션의 시작이었다.



저 단락을 보면 생각나는게, 이 분이 해금 풀린 후에, 티비 프로에서 회고를 할 때 그러시더라. 기타가 너무 치고싶었는데
살 돈도 없고,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도 벅차서 굶기 일수인데, 기타를 줍기 전엔 고무밴드 몇 개를 널판지에 못 박아서
촘촘히 걸어서 기타처럼 만들어서
음 잡아가며 퉁기고, 혼자 열심히 해봤댄다. 너무나도 갖고는 싶은데,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그야말로 환장하게 좋은데 먹는게 더 시급한 거렁뱅이에게 그건 안 될 일이니, 만들어서라도 비슷하게라도 그러구서 달래보자며
그래봤단다.  
그 일화를 들을 때, 괜히 전설이 아니구나했다.  그러구서는 그 방송 끝나고 마분지랑 고무줄 왕창 들고 나가서
필자도 따라해 봤지만 실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패해 보니, 이 분이 더 존경스러웠고 그 후론 티비에 나오더라도 목소리 답답해서  맨날 발음이 '해 해~' 이러고
들려서 싫더니만, 변덕이 
났는지 다르게 보였고, 하여 그의 노래를 경청해서 듣고, 특히 그 연주를 더 주시깊게
집중해서 즐기게 되었었다.

 

 

 

 

 

위의 저 신중현씨 이력서라고 된건, 그 분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캡쳐한 것이다. 글 쓰다보니 이 분이
결성했던 그룹의 
그 순서라는게 헷갈리기도 했고 알고싶기도 해서 이래저래 찾다가 저기까지 가서
이렇게 모셔왔다.
그렇기에, 저 사진에는 사진의 출처지인 공식 홈페이지가 새 창에서 열리도록 링크가 되어있으니
팬이신 분들은
얼른 가보시라. 사진 쿡~ 누르면 된다. 사진 위에 마우스 올려두면 마우스 포인터가 손처럼 되는
친절한 링크니까.

 

 


   ▲ 신중현과 엽전들 버전 : 70년대

 

 

이 글을 처음 열었을 때 나오는 '더 맨'의 버전이 가장 오래되기도 했고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노래가
처음 1972년도에 
'신중현과 더 맨'으로 세상에 나온 최초 버전이랄 수가 있다. 요 문장들 위의 엽전들 버전은
그 이후의 버전이다만 
이 곡은 같은 신중현씨라도 70년대에 부른 곡의 반주나 그 장중한 색채와 80년대의
화려함이 강한 색채나 연주나 
여성의 강력한 코러스같은 면에서 차이가 난다. 같은 뮤지션이 자기 곡을 또
재탕해서 부르는 것은 커버라던가 
리메이크가 아니다.
이런 경우는 리바이벌이 맞다. 이선희가 부른게
리메이크고 신중현씨가 몇 번을 몇 년도에 다시 
새로
편집해서 불러도 그건 리바이벌 버전이 되는거다.
자신이냐 남이 했느냐로 리바이벌과 리메이크가 달라진달까.

그 개념을 설명하기가 아주 딱 그만인 유명한 곡이 바로 '아름다운 강산'이라고 할 수 있다. 중간 허밍도 달라진다.
70년대는 그 시대상 때문인지 뭔가 어둡다면, 88년 올림픽 직전 년도나 해금된 그 무렵의 뮤직 파워본은 그야말로
최고의 화려함을
내뿜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원래 이선희 빠였으나, 이선희 데뷔부터 정치에 입문 전까지만
광팬이었던거고,
이후는
정내미가 떨어졌고 목소리도 변해서 취향이 아니게 되서도 좀 그렇다만, 아무리 좋아하던
이선희라해도
이 곡만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하고싶을만큼 지금도 이선희 버전을 안 좋아한다. 저 오묘한
허밍이 무슨
빰빠라밤빰 빠바밤?
오히려 이렇게 조용조용 연주와 노래를 하더라도, 그 깊이나 포스는 오리지날
뮤지션인 신중현이
참여한 밴드들에게 있다. 물론...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필자 개인 취향이니 존중해 주길.

 

 


 { 간략한 음악 활동 연보 } 
 히키 신 (Hicky Shin) : 솔로 기타리스트 ☞ 
 신중현과 애드 훠(Add 4) 신중현과 더 맨(The Men) 신중현과 엽전들 신중현과 뮤직 파워(Music Power)

 

나무 위키가 위키백과보다 내용이 친절하고도 자세했는데, 좀 거기서 발췌를 해 보면 이렇다는거.
중간에 이선희가 노래 커버했다 라고 나오는데, 위에서 짚은대로 커버라는 개념이 남이 부르는 리메이크라는거다.

 


 신중현은 1955년 미 8군에서 연예단으로 데뷔, '히키 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경 Add 4를 결성하고 1964년에 1집 '빗 속의 여인'을 발매했다.
 이 시기는 영, 미에서도 로큰롤 밴드 결성 붐이 막 일기 시작한, 즉 록밴드 역사의 초창기였던 시절이다.
 신중현은 이 Add 4 때부터 본격적으로 밴드의 프런트맨이자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국내 첫 창작 록 음악인 '빗 속의 여인'을 시작으로 무수한 불후의 명곡을 발표했다.

 Add 4는 당시 베이스 기타를 도입한 몇 안 되는 밴드였고, 그래서 당시 쟁쟁한
 로큰롤 밴드들(키보이스 등)과 더불어 새로운 사운드를 재빠르게 도입한 밴드로 역사에 남았다.
 키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당시 서구의 최신 음악을 최대한 재현해내는 데에 집중하거나, 엔카식의 멜로디와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면, 신중현은 훨씬 진일보한 한국 특유의 로큰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

 본인의 음악 뿐 아니라 당시 여러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발굴한 뒤, 곡을 주고 프로듀싱까지 해서
 데뷔도 많이 시켰다. 이 때 여러 가수와 곡이 히트해서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
 이 신중현 사단의 유명한 가수로는 박인수, 펄시스터즈, 이정화, 김추자, 장현, 김정미 등이 있고,
 유명곡으로는 '거짓말이야', '커피 한 잔', '꽃잎', '봄비', '봄' 등이 있다.
 한 마디로 1960~70년대 대중 음악계에서 신중현의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3공 시절 박정희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많은 곡이
 금지곡으로 묶이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박정희 찬양곡 요구를 거절한 이후 얼마 후에 발표한 곡이
 그 유명한 '아름다운 강산'이다.
 이 노래는 처음에 '신중현 더 맨'곡으로 박광수가 보컬리스트로 있을 때 처음 녹음되었다(1972년).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파동 이후 '아름다운 강산'은 한동안 본 의미와는 한참 다른 건전 가요로 소개되었다.
 후에 이선희가 커버해 유명해진 곡이기도 하다. 아래 원곡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10분이 넘어가는 대곡이다.

 그의 세 아들도 모두 음악 활동을 했는데, 장남 신대철은 현재 록 밴드 시나위의 기타리스트를 맡고 있으며
 차남 신윤철은 원더버드 등을 거쳐 2012년까지 서울 전자 음악단의 보컬 및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었다.
 세션 드러머로 유명한 삼남 신석철은 형 신윤철과 함께 서울 전자 음악단에서 활동하다가 2010년에 탈퇴하고
 그 후로 세션 활동에만 집중하고 있다.

 2009년 12월 15일, 신중현은 악기 제조업체 펜더로부터 세계에서 6번째, 아시아 뮤지션으로는 처음으로
 Custom Shop Tribute Guitar를 헌정받았다. ( 그 6인은 아래 사진 참조 ↓)


 

 

 


   ▲ 신중현과 뮤직파워 버전 : 80년대





 

자, 위의 뮤직파워 버전은 어딘가 많이 익숙할거다. 이선희가 카피한게 바로 이 버전이다.
그래서 처음 나오던 쥬크박스랑
이 위의 엽전들 버전하고는 느낌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른거다. 어찌보면 시대상도
담겨져있는 편집이랄 수도 있다.
그 펜더 기타라는거 누구누구랑 신중현씨까지 여섯명이냐고? 당연히 오래된 락좀 들은 사람들은 아는 이름들이다.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제프 벡(Jeff Beck),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
잉베이 말름스틴(Yngwie Malmsteen) 혹은 잉위 맘스틴... 이렇게도 부르지.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하고
신중현씨다. 쟁쟁한 사람들 아닌가. "으아.... 야드버드, 백 보거트 앤 어피스, 한국에는 신중현님이 계시다는거.
만세~!!!" 나도 모르게 진짜로 만세 불렀다 그것도 꼭두 새벽에.
다들 에릭 클랩튼을 부드러운 남자로만 생각한다. 아들에게 보내는 그 '우쥬 노 마이 네임~' 이렇게 시작하는
어쿠스틱 앨범에 있는 Tears in Heaven 때문에 그렇게 보는데, 하기서 거기에 리바이벌 된 레일라 그 곡도
딱 어쿠스틱스럽게만 바꿔서, 에릭 클랩튼이 젊은 시절에 야드버드라는 밴드에서 막 날리던 그 옛날, 처음 나온
레일라가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몰라서 그런다. BB&A 여기의 제프 벡은 정말 말할 필요도 없고. 이 집 제품을
받으신 분들은 나중에 따로 그 분들의 음악 세계를 설명하는 포스팅을 쓰도록 하고 패스하겠다.

 


 


     ▲ 조용필 버전 : 상당히 건전가요스런 80년대 본

위에 재미난 버전은 바운스 바운스 하시는 영원한 오빠, 그렇지만 육순을 넘긴 그 분의 특이 버전 되시겠다.
리메이크, 리바이벌을 다 몰아서 한 곡을 즐기는 것도, 음악광들에게는 시간내서 해봄직한 감상 방식이다.
그러니 안 들고 올 수가 있나. 이선희 버전은 많이 들어봤어도, 이런 건전한 오빠의 영상이라니. ㅎㅎㅎ
반주의 트럼펫 소리가, 딱 MBC 악단같더라니, 영상에 그렇다고 나온다. 이것도 뮤직파워 커버랄 수 있다.
이선희의 빰빠라밤이랑 또다른 앙칼짐도 즐감들 하시기를. ㅋㅋㅋ 진짜~~ 디게디게 건전하다. 그리고 역시
아무리 용필이 오빠라도, 우리 신중현님께는 감히 대적이 아니되신다는거. 움므하하하핫~







자, 그럼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가장 많이 들어보셨을거 같은 이선희 버전을 아래 낑구면서 마무리 하겠다.
사람에 따라서는 같은 곡이라도 특히나 좋아하는 버전이 있다. 그리고 역시 더 귀에 익숙한 버전도 있고.
여튼 이 곡을 이선희 곡 아니냐는 요즘 세대들 보면 한숨이 난다. 아니거든? 오리지날을 들어보고 제발좀
막귀를 벗어나서 예술적인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혀보길 바라면서, 락의 대부가 원조라고 밝히는 바이다.
이선희 버전이 왜 싫었는지, 또 보다보니 알겠더라. 더 맨이 72년에 처음 낼 적에 장중하고 깊던 그 맛을
경망스럽게 몸 잘잘 흔들고 몸을 까불어대 막. 경건해도 모자랄 판에. 그리고 목소리를 막 긁어. 아냐 그거.
파워있게 한다, 이선희다운게 나은데 이건 락도 뭣도 아니고, 골수 락 신봉자에겐 락 커버인거지 좀 아냐.
여하간 이 노래는 필자는 가볍게 부르는 느낌이 싫었다. 가벼울 수가 없는 의미가 큰 노래라서 그렇고,
굳이 저런 모션에 과한 퍼포먼스 안 들어가, 이 노래 자체가 마약만큼 쎈 파급력이 어마어마하거늘.
또한 뭔가... 중간에 가사가 통채로 날아갔다는걸 잘들 알까나 모르겠다. 신중현 버전들에 익숙했던 필자는
이선의 버전을 따라부르다가, "어? 안 나와? 왜 중간에 안 되지? 아니 이 가사는 왜 내가 알고 있지?"
하고 혼란도 오더라. 그래서 그 후로는 버전들을 더 자세히 모으고 듣고 하면서 뭘 날려먹었나를 캐치했다.
♬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지고... 이선희는 오늘 타령이 잘 읎더라. 허~
(나올 때도 있고, 살라먹을 때도 있고... 그러나 요 부분에서 주는 더 맨 버전의 느낌만은 못 살려주네 결코)

원래부터도 가급적 오리지날부터 챙겨듣고, 원조를 더 좋아하고 뭐 그러다보니 저 버전 그닥 별로인거다 늘.
게다가 이선희 버전은 죄다 무슨 어디 나가서 쑈에서 부르던데... 그나마 제일 어린 버전? 첫 리메이크한 시점?
그 버전이 그래도 낫지 싶어서 그렇게 들고 와 본다. 잠 한 번 안 왔다가... 암튼 몹시 길게도 써버렸다.


    ▲ 이선희 버전 : 80년대 후반, 방송본

 

Posted by Sesshou
: